메뚜기 뛰는 들녘에
가을이 저 먼저 다가와서 그 아찔한 가을 빛깔을 앞마당에 가득 뿌려 놓았습니다. 그 현란함에 숨이 막혀 살며시 뒤 돌아 서서 한숨을 돌렸습니다.
모처럼 들판에 나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 가을을 또다시 덤덤하게 놓쳐버린다는 것이 싫어서 입니다. 가을 들녘에 나설 때에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홀가분합니다. 그냥 우두커니 서서 바라만 보고 마음 속으로 느끼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멀찌감치 내려다 보이는 가을 山과 들판은 한 폭의 水彩畵 그 이상 입니다.
形形色色…. 인간이 찾아낸 그 어떤 色調로도, 그 어느 大家의 손기술로도 감히 표현해 낼 수 없는 壯快한 自然의 파노라마가 연출 됩니다. 그 경외로움 앞에 서 있는, 심미안이 없는 무료한 관객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작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都心을 조금만 벗어나도 이 驚異로운 대자연의 숨결이 있거늘.
노랗게 익어가는 벼를 가슴 가득 품고 있는 논의 때깔은 순금덩어리를 보는 것보다 더 아릿한 설레임으로 눈을 아프게 합니다.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으로 일렁대며 가을 햇살을 반사하면서, 금방이라도 내 가슴을 향해 치달아 올 것만 같습니다. 바람도 질세라 그 순수한 맑음으로 머리 결을 스치고, 농가 한옆 길가에는 널어놓은 고추가 새빨갛게 타오르듯 말라 갑니다.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丹楓은 나도 여기 이렇게 있노라는 듯 여러 빛깔의 호사한 옷차림으로 저마다 개성을 뽐내며 타오릅니다.
논두렁으로 들어섭니다. 키보다 높게 자란 코스모스가 금방이라도 팔랑팔랑 떨어져 내릴 듯한 모습으로 연분홍 꽃잎을 하느작대고, 여기 저기 벼메뚜기가 뛰는 모습도 눈에 뜁니다. 어릴 때 방아깨비, 풀무치라 부르며 수십 마리씩 잡아 강아지풀 줄기에 주렁주렁 꿰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풋! 하고 짧은 웃음소리가 내 입술을 헤치고 튀어 나갑니다. 이 짧은, 그리고 찰나적인 웃음이야 말로 내 속에 숨어있는 가장 순수한 웃음 일지도 모릅니다.
고추잠자리도 몇 마리 뒤 따라오며 이 가을 오후의 風景 속에 내가 빠질 수 있겠냐는 듯 맴을 돕니다. 높고 새파란 하늘과 뭉실뭉실한 흰구름,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손바닥 같은 황토 흙, 그리고 고추잠자리의 자맥질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질박한 앙상블은 또 다른 美學이 됩니다. 고요한 정밀(靜密) 속의 아주 작은, 그러나 소리 없는 生命力의 調和와 하모니………..
아아 좋구나. 참 좋구나.
이 가을 들녘은 너무 좋구나. 이처럼 아름다운 색의 對話를 감히 人間이 어찌 다 흉내낼 수 있으랴. 글로써, 말로써 다 표현 할 수 없음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는 들판 풍경 입니다. 不立文字… 이 自然의 조그마한 造化도 다 表現해 내지 못하면서…이 풍요로운 자연 속의 일부로 속절없이 사는 삶들이 감히 자연에 무례하며, 이 자연이 제 것인 양 호들갑을 떨며 하루 햇살을 능멸하다니…… 아름답다는 말조차 함부로 내뱉기 어려운, 범접하기 어려운 이 자연의 코러스 속에서, 인생과 자연의 참뜻과 대진리를 깨우쳤던 옛 禪僧들의 無言의 일갈(一喝)이 이제 이해가 갑니다.
서너 시간 그렇게 들녘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어스름, 저녁이 되었습니다. 보름이 가까워서 인지 둥근 달도 때이른 시간에 희끄무레하니 하늘 한 자락에 얼굴을 내밉니다. 좀 춥다는 생각을 하며 발 걸음을 집으로 옮깁니다. 들판에서의 시간은 새로운 感動 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을은 되짚어 볼수록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제부터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 감동은 점점 더 深化되고, 더욱 더 짙은 농도로 가슴 한구석에 아로새겨 질 것 입니다.
밤이 되자 낮과는 또 다른 풍경이 전개 됩니다. 도리깨질 판에 까는 멍석만큼이나 크고 둥근 달이 본격적으로 하늘을 장악하면서 산도 들도 그 빛을 달리 합니다. 금년 秋夕에는 달에게 꼭 所願을 빌어 보겠다고 作心했었는데 못하고 말았습니다. 추석 전후하여 계속 비가 내리는 바람에 칙칙한 시간들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월 한번씩 보름달이 뜬다면, 내가 살아온 삶을 어림잡아 계산해도 600번의 보름달을 볼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도대체 몇 번이나 맑은 보름달을 정색하고 바라보며 “달이 밝아 참 좋구나 !” 하며 달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았을까…. 참으로 무미건조하고, 무감각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아쉬움 半, 미련 半의 悔恨과도 같은 감회가 일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몇 번이나 더 저 달을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있을까? 그저 한 100번쯤?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습니다. 앞으로는 매달 보름달을 열심히 챙겨 보면서 두터워 져가는 남은 삶의 연륜을 調律해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여간 달은 아름답습니다. 가을 달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어둠보다는 차라리 가을 바람의 스산함 속에 청량하게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아닐까 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서나 느끼는 일이지만 이놈의 귀뚜라미들은 여름 장마만 끝나면 어느새 온통 밤공기를 뒤 흔들어 놓기 시작 합니다. 오늘 밤도 예외 없이 귀뚜라미들은 목청을 돋구고, 마치 너희들 人間事 無常함을 아느냐는 듯 無心한 합창을 해대기 시작 합니다. 이렇게 또 다른 가을 情景이 깊어 가는 밤과 함께 무르익기 시작 합니다. 환한 달빛 아래 산과 들은 女人의 부드러운 허리처럼 端雅한 곡선들을 그려내면서 한낮의 분주 했던 風光들을 전혀 다른 빛깔로 물들이며 잠들어 갑니다. 窓가를 가득 메운 달빛 속에서 생각에 잠깁니다.
산다는 것…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인가, 살아 지는 것인가, 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秋風隱來紅葉間 추풍은 붉은 잎새 사이로 몰래 찾아 드는데
何處故友是惻節 서글픈 이 계절 옛 친구는 모두 어디 갔는가
心寒身苦無一物 심신은 고달프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貧妻無言望山月 가난한 아내는 산에 걸린 달만 보며 말이 없구나
山中不知何歲月 산속에 살 때는 세월이 뭔지 몰랐는데
歸俗悟意世波酷 마을로 돌아오니 세파 잔혹함을 이제 알겠네
唯一所願平溫居 오직 한가지 바라는 건 평온한 삶 일진대
蟀聲孤響秋夜長 귀뚜라미 외로이 울고 가을 밤은 길구나.
가을 밤의 情景은 神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절묘한 膳物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찌 神의 名作을 글로서 풀어 낼 수 있겠습니까. 人間의 오만 불손하고 無謀한 욕심일 뿐. 이럴 때 내게 詩才나 文才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들에서 돌아오던 길에 들렸던 대폿집에서 한 선배님이 막걸리 잔 털어내며 해주던 이야기가 생각 났습니다. 삶을 이렇게도 정리해 볼 수 있다는 것 입니다.
50이 되면 男女의 구별이 없어지고
60이 되면 많이 배운 자나 덜 배운 사람이나 똑같아지며
70이 되면 부자나 가난한자나 모두 같으며
80이 되면 산자와 죽은 자의 구별이 없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 오는 길에 자꾸만 그 말이 생생하게 다시 뇌리를 스치는 것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람의 한평생 사는 길은
人力으로 어쩔 수 없이 모두 같은 길이 되고 만다는 뜻인가.
禪問答 같은 말이었지만 분명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대로 한가로움 속에서 가을의 운치에 흠뻑 젖으며, 고단한 삶을 한번 더 되짚어 볼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 내 삶이 언제나 이리 平和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소음과 慾望의 물결이 넘실대는 사람 사는 마을의 세파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몇 번이나 더 이 아름다운 달을 바라볼 기회가 올 것인지 가늠하지도 못하면서, 永遠히 살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착각 속에서, 또 다른 아주 작은 物慾에 집착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시작 할 것입니다. 이게 진정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일까?
바라고 또 바라건대, 하늘이시여…
아프지 말게 해주소서.
그저 조금만 갖고도 平溫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주소서.
교만해 지지 않도록 해 주소서.
이 짧디 짧은 숨결 속에 왔다가는 세상
맑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있다 가게 하소서.
그리고, 한번 더 비나이다.
저로 하여금 제발,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이 없도록 도와 주소서………………………..
이제 잠을 청해야 할 시간 인 것 같습니다.
2005년 10월 15일 土曜日 밤, 五浦邑에서 草 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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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보내준 메일과 같이 보내온 初老의 어느 분이 쓴 글...
가끔 들춰 보는데...볼 수록 가슴에 새겨지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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